Book2015. 10. 29. 15:48






오베와 고양이가 주택들 사이에 난 작은 길로 나섰을 때는 겨울의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뒤였다.

생일 파티의 웃음과 음악이 벽 사이에서 커다랗고 따뜻한 카펫처럼 흘러나왔다. 

소냐라면 무척 좋아했을 거라고 오베는 생각했다. 

그녀라면 이 정신 나간 임산부와 그녀의 말도 안 되게 제멋대로인 가족이 오고 나서 벌어졌던 일들을 사랑했을 것이다. 

엄청나게 웃어댔을 것이다. 맙소사, 오베는 그 웃음이 얼마나 그리운지 몰랐다.

- p433



이등병 백일 휴가를 나와서 내 눈길을 가장 사로잡았던 것은 서울 거리를 도도하게 거니는 섹시한 여자들이 아닌, 평범하다 못해 잘 눈에 띄지는 않는 아저씨들이었다.

'나는 온 힘을 다해, 가까스로 100일을 견뎌냈건만, 이 수많은 평범한 남자들은 어떻게 2~3년이라는 군생활을 묵묵히 견뎌냈던걸까. 그리고 그러한 대단한 사실을 자랑도 하지 않고 이렇게 평범하게 살아가는 것일까.'

이런 생각을 했었다.


막상 나도 어느새 2년의 군복무를 마치고 무사히 제대를 한 지도 수 년이 흐르고 나니, 그깟 군생활 별 건 아니라는 생각은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 때의 충격이 여전히 가시지 않는 이유는, 제한된 경험과 가치관만 가지고 함부로 누군가를 판단할 자격은 누구에게도 없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최근, 심각한 청년실업과 임금피크제 등의 이슈로 인해 세대간의 갈등이 심각해지고 있다. 기성세대로 함부로 청년세대의 어려움을 판단하고 소위 '우리 때는 말야'로 시작하는 말을 삼가야 하지만, 그 못지 않게 청년세대 역시 기성세대들의 수고와 노고를 비하해서는 안된다. 다소 뻣뻣하고 무뚝뚝할 수 있는 기성세대에게도 따뜻한 피와 여린 감정이 내면에 존재함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오베라는 남자를 통해 나 역시 잊고 있었던 감정들에 대해 다시금 상기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는 흑백으로 이루어진 남자였다.

그녀는 색깔이었다. 그녀는 그가 가진 색깔의 전부였다.

- p57


사람들은 오베가 세상을 흑백으로 본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녀는 색깔이었다. 그녀는 오베가 볼 수 있는 색깔의 전부였다.

p69


책의 초반에는 무뚝뚝하고 신경질적인 오베의 현재 모습이 나온다. 모든 사람에게 시비를 거는 것처럼 보이고, 과도한 완벽주의로 주변을 피곤하게 만드는 전형적인 꼰대같은 모습.. 이러한 표현에 나 역시 어딘지 불편해서 책을 덮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소설이 과거로 회귀하면서 점차 오베의 성격의 인과를 이해할 수 있었고, 그런 그에게도 사랑스러운 존재(소냐)가 생기면서 보다 사람다워진다.





이 세상은 한 사람의 인생이 끝나기도 전에 그 사람이 구식이 되어버리는 곳이었다. 더 이상 누구에게도 무언가를 제대로 해낼 능력이 없다는 사실에 나라 전체가 기립 박수를 보내고 있는 상황이었다. 범속함을 거리낌 없이 찬양해댔다.

- p119


과거에는 우리나라도 교역은 중국과만 해도 충분했다. 그 마저도 상위계층의 사치를 위해서였을 뿐, 대다수의 국민들은 교역과 상관없이 스스로 먹을 것을 생산하고 소비했다. 하지만 이제는 외국과의 교역이 없다면 단 1년도 버틸 수 없는 것이 우리나라의 현실. 이러한 과거와 현재 사이에서 태어난 세대들은 그 이후에 태어난 세대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먹을 것을 구매하면 그만이라 생각하고, 온갖 상품이 지천에 깔렸는데 살기 힘들다고 불평하는 세대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우리 때는 말야'라는 말이 나오는 것도 이해를 못할 것은 아니다. 과거와 달리 너무 빨리 변하는 세상이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다.





어느 날 아침 그녀를 보았다. 그녀는 갈색 머리에 푸른 눈을 가졌고, 빨간 구두를 신고 머리에 커다란 노란색 핀을 끼웠다.

이제 더 이상 오베에게 평온하고 조용한 시절은 없었다.

- p162


무뚝뚝하고 조용하고 시니컬했던 오베의 인생이 통째로 뒤바꼈던, 모든 가치관과 사고방식이 흔들렸던 순간.

그런 순간을 맛보게 하는 인연을 만난다는 기분은 어떤 것일까.





그 때는 그걸 몰랐지만, 그는 훗날 자기 인생의 수많은 15분을 그녀를 기다리며 보낼 운명이었다.

마침내 그녀가 꽃무늬가 그려진 긴 스커트를 입고, 오베로 하여금 자기 몸의 무게 중심을 오른발에서 왼발로 움직이게 할 정도로 새빨간 카디건 차림으로 나타났을 때, 오베는 시간 약속을 못 지키는 그녀의 무능함이 그렇게 중요한 문제는 아닐지도 모른다는 결론을 내렸다.

- p 184


영화 '국제시장'이 감성팔이용이라는 비판을 받는 것을 보면서, 영화에 대한 관심이 사라졌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지난 달, 필리핀에 사는 사촌동생을 만나고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무료한 시간을 때우기 위해 영화를 감상하면서 의외로 느낀 점도 많았다. 늙고 고집만 세진, 별볼일 없어 보이는 어르신들(과격하지만,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내면 속에 품는 평가가 아닌가). 그들에게도 우리처럼 젊고 건강한 때가 있었고,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모든 것을 내어주던 때도 있었다. 인생의 철칙이었던 시간약속의 가치관을 내려놓을 수 있게 만들었던 사랑하는 사람의 매력. 평생 수많은 15분을 기다리면서도 이를 이해하며 살았던 오베에게도 누구보다 뜨거운 심장과 감정이 있었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사람마다 다양한 주제와 생각을 떠올릴 수 있겠지만, 나한테는 늙은 오베의 가슴 뜨거웠던 과거와 사랑, 그리고 나이가 들어서 이러한 모습이 가리워진 것 같지만 여전히 생명력이 있는, 누구와도 같은 한 사람이라는 것이 가장 와닿았던 깨달음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스토리는 누구나 가지고 있는 각자의 인생의 역사일 것이다. 소설이나 문학은 이를 모방할 뿐.

2016년 3월에 영화도 나온다는데, 오베 역할을 누가 맡게 될까. 구성이 어려운 시나리오는 아니지만, 섬세한 연기와 표현력이 중요할 것 같은데.

원작 못지 않은 영화가 나타날 지도 기대된다.






오베라는 남자

저자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출판사
다산책방. | 2015-05-20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건드리면 폭발하는 오베가 왔다!"전 세계 30개국 판권 수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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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ilovewort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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